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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는 행인, 나는 나룻배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2.06.10 조회 : 6807

 

 고향 강릉에서의 불교활동

 

내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다. 강릉시 금학동에는 강릉포교당 관음사가 있다. 이 사찰은 강원도 3본사(유점사, 건봉사, 월정사)가 연합하여 영동지방의 중심 도시 강릉 지역의 불교 포교를 위하여 1922년 강릉포교당을 개원하면서 창건된 사찰이다. 1923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 명부가 발견되어 이곳이 우리나라 유아교육의 남상지(濫觴地)임을 입증했다. 이 절에 강릉불교학생회가 있었다. 중·고등학생 불자들의 모임이었다. 1963년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학생회의 일원이 되었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가 되면 학생회 법회가 열려, 스님의 법문과 토론회가 이어지곤 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중등부 회장이 되었다. 이때 만났던 선후배들은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청년회 회장이었던 홍덕유 선배와는 친형님처럼 가까이 지냈다. 우리는 법회 시간에 들은 법문과 선배들의 이야기 속에서 원효 스님과 만해 스님 그리고 《삼국유사》를 알게 되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갔다. 《우리말 팔만대장경》(성전편찬위원회 편, 법통사, 1963)을 읽은 것도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이었다.

 

불교 공부에 열성이었던 우리는 지나가는 스님에게도 불교의 가르침을 청해 들었다. 그 무렵 어느 날 한 객승이 강릉포교당을 방문했다. 나는 그분에게 이런저런 불교에 관한 궁금증을 털어놓았는데, 그 스님은 “너는 아직 어리니 잘 모른다. 이런 거나 읽어봐라. 혹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 모르겠다.” 하면서 책 한 권을 건넸다.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이었다. 나는 그 시집에 실린 주옥같은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거기에는 그동안 절에 다니거나 생활하면서 생긴 궁금증을 해소할 만한 구절이 있었다. 유명한 〈님의 침묵〉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이 구절은 그동안 법문으로만 듣던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이었다. ‘바로 이거다.’ 어린 나는 그때부터 만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66년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강릉불교학생회 회장이 되었다. 그 무렵 나의 만해에 대한 관심은 주변의 친구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고등학교 2학년 첫 국어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교과서에 실린 만해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에 대해 소감을 말할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틈만 나면 《님의 침묵》을 들고 다니며 외우던 나를 눈여겨본 친구들은 “만해는 보삼이가 잘 알아요.”라며 추천했다. 나는 교단으로 불려 나가 1시간 동안 만해의 생애와 시 〈알 수 없어요〉에 담긴 불교에 대하여 설명했다. 모두 혀를 내둘렀다. 선생님은 그냥 관심 정도가 아니라 높은 수준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 전보삼(全寶三) 

 

이를 계기로 나는 더욱 만해 한용운에 관한 공부를 했다. 서울 인사동의 통문관에 편지를 보내 《한용운연구》(박노준‧인권한 저, 통문관, 1960)라는 책을 구해 읽으며 만해 연구에 빠져들었다. 강릉불교학생회의 회지인 〈보리수〉라는 신문을 만들고, 거기에 만해 일대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있던 조순 박사(서울시 초대 민선 시장,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역임)는 스즈키 박사의 《선에 대하여》라는 영문으로 된 책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조순 박사는 내 친구 조기송의 아버님이다. 아들 친구가 《반야심경》을 줄줄이 외우고 불교에 관심이 많다는 말을 듣고 기특하게 여겨 선물한 것이었다. 이 책은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강릉포교당에 다니면서 많은 고승대덕을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윤허‧석주‧전강‧탄허‧향봉‧청우‧도원‧도문‧초연‧혜거‧삼지‧삼보‧부동 스님 등이다. 제방의 선지식들을 만나면서 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였다. 특히 강릉포교당에서 개최된 탄허 스님의 화엄학 1주일 특강은 큰 감동이었다. 그것이 큰 발심의 원천이 되어 화엄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훗날 〈만해 한용운의 화엄사상〉으로 동국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계기가 되었다.

 

 

 

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잠시 오대산 사고지가 있던 사고사에 들어가 정진했다. 대학은 1970년 한양대 공대로 진학했는데, 고향을 떠나면서 나는 수첩에 세 가지 다짐을 적어 넣었다. 첫째는 만해가 말년 11년을 살았던 성북동 북향집 심우장을 찾아가볼 것, 둘째 망우리에 있는 만해 묘소를 찾아가볼 것, 셋째는 만해의 제자인 강석주 스님 등을 찾아 뵙고 만해의 생애와 사상을 배울 것 등이었다. 실제로 나는 서울에 와서 삼청동 칠보사로 석주 스님을 자주 찾아뵈었고, 수소문 끝에 어렵게 찾아낸 망우리의 만해 묘소를 찾아 묘지의 풀도 뽑고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곤 했다.

 

이렇게 만해와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내가 한양공대 화학공학과에 진학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불교 공부를 해서는 호구가 어려우니 엔지니어가 되어야 한다는 주변의 강권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책가방 속에는 《한용운연구》나 스즈키의 An Introduction to Zen Buddhism(grove press, inc. new york, 1964)이나 고형곤 박사의 《선의 세계》(태학사, 1971)같은 불교 서적이 들어 있었다. 전공과목이나 학과의 동료들보다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약칭 대불련) 활동에 관심이 더 컸다. 당시 대불련 서울지부의 수요법회는 활기가 넘쳤다. 수요법회는 물론 토론회, 독서 모임 활동도 늘 새롭고 재미있었다. 대학 2학년 때는 대불련의 종교부장으로 법회의 의전을 담당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 최 아무개가 찾아왔다. 왜 한양대학교에는 불교학생회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학생회 조직을 시작했다. 1972년 3월 한양대 불교학생회를 창립하여 학교 당국에 등록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양대 불교학생회는 한용운의 시화전, 불교사상 강연회 등을 개최했다. 이기영 박사, 서경수 교수, 미당 서정주 시인, 김지견 박사 등의 강연은 한양공대생들 가슴에 인문학의 갈증을 채워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한양대 불교학생회는 대불련 서울지부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 1972년 망우리 만해 묘소 참배 장면(좌측에서 두번째)  

 

 

1972년 나는 대불련 전국대의원회 의장이 되어 더욱 활동에 매진했다. 덕산 이한상 거사가 마련해준 풍전상가의 사무실이 주요 거점이었다. 1972년 가을 대불련 주최 전국대학생불자 청년제, 학술경연대회가 동국대학교에 대강당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나는 〈한용운의 독립정신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최우수상을 받는 등, 대학생들 사이에서 만해 연구의 전문가 노릇을 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이 잊고 있던 망우리의 만해 묘소를 대학생들과 함께 찾으면서 대학생 불자들의 가슴에 만해를 심었다. 50년이 지난 요즘도 3‧1절을 맞아 망우리를 찾는 학생 대열을 보면 여간 흐뭇하지 않다.

 

 

 

만해전집 보급운동

 

대불련 의장을 하던 그 무렵(1972년) 신구문화사에서 한용운 전집 발행 작업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만해의 제자 효당 스님의 만해연보 정리작업을 도우며 출판사로 심부름을 다녔다. 1973년 7월에 신구문화사에서 《한용운전집》 전 6권이 드디어 발행되었다. 나는 출판사 측과 교섭해 대불련이 총판을 대행하고 그 판매기금으로 한용운 동상을 건립하자고 했다. 이 사업은 대불련 전국대의원 총회를 통하여 결의되었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한용운전집》 보급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 사업은 채 1년이 못 되어 뜨겁던 열기가 식어갔다. 학생 신분이라는 한계 탓인지 목표의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실망한 나는 그동안 여러 차례 큰 도움을 주신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스님을 찾아갔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스님은 격려를 겸해 이렇게 타일러주셨다.

 

“자네들이 이룩한 그만한 성과도 대단한 것이야. 그러나 모든 일이란 것은 그리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되네. 늘 시작이라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해.”

 

요컨대 무슨 일을 하던 초심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만해 운동의 초심을 다시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은선암 복원불사

 

1974년 2월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ROTC 청년장교로 임관했다. 임지는 경기도 이천 부발면에 있는 예비사단으로, 병과는 통신장교였다. 통신대와 대대 OP 관리운영이 주요 업무였다. 대대본부로부터 1.5킬로 떨어진 마음산 8부 능선에 있는 대대 OP를 방문하여 보니 바로 옆에 은선암이라는 옛 절터가 있었다. 부대에서는 절터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식수를 해결하고 있었다. 병사들과 음용수 해결을 절의 도움으로 해결하니 우리도 절에 무엇인가 도움을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절은 이미 폐사된 상태라 방법이 없었다. 은선암은 수원 용주사 말사였다. 용주사에 폐사된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교통편이 불편하고, 물자 수송이 어려워서 그곳에 가 살 스님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스님이 오시면 물자는 병사들이 운반하여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병사들과 OP를 오르내리며 물자를 날라 복원불사를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이천 마음산 은선암은 복원 정비가 이루어졌다(1974년 10월).

 

이 소식이 이천 설봉산 영월암 주지 스님께도 알려졌다. 하루는 스님께서 찾아와 영월암의 소원이 전화기 개통인데 해결책이 없는지 물으셨다. 전화기는 당시 부의 상징이요, 귀한 물건이었다. 주지 스님에게 청계천에 가면 전화선을 파는 곳이 있는데 10통만 사다 놓고 연락하라고 하였다. 스님은 신도회장을 시켜 즉시 전화선을 구입하여 놓고 연락을 해왔다. 대민지원사업으로 1개 분대 병력을 활용하여 사찰 정상에서 밑으로, 밑에서 위로 작전하듯이 한나절 만에 전화선을 연결하고 즉시 개통해주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에 1,200년 만에 전화가 통하게 되었다고 기뻐하시며 떡 잔치를 열어 주었다. 지금도 돌아보면 청년장교 시절의 대민지원사업은 보람차고 신바람 나는 일이었다.

 

 

 

《님의 침묵》 초간본 소장

 

육군 중위로 전역한 나는 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었다. 주말에는 칠보사의 학생회 지도법사로 활약하고 대불련의 간사로도 활약하였다. 그 당시 또 나에게 찾아온 하나의 큰 선물은 송욱 교수의 《전편해설 시집 님의 침묵》(과학사, 1974)이었다. 선의 입장에서 《님의 침묵》을 바라본 송욱 교수의 관점은 기존의 해석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만해 공부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 경남 사천 다솔사(1972.3)에서 효당 최범술스님과 함께 한 모습

 

 

그 무렵 나는 작은 욕심을 하나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기왕에 만해 공부를 시작했으니 《님의 침묵》 초판본을 구해서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 당시에도 《님의 침묵》 초판본은 매우 희귀한 책이었다. 인사동이나 청계천 고서점에 수소문하여도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77년 무렵에 우리나라에서도 고서적 경매시장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고서 경매는 광화문 HB문고에서 열렸는데 《님의 침묵》 초간본도 경매에 나왔다. 그런데 가격이 당시로서도 대단히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아마도 경매보다는 이런 책이 있다는 홍보 효과를 노린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책값의 현실화를 요구하였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소장자를 알게 된 것만도 큰 수확이었다. 필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책의 소재를 확인하면서 1년여 만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금액을 주고 드디어 초간본을 소장하게 되었다. 천하를 다시 얻은 기분이었다.

 

《님의 침묵》 초간본은 1925년 8월 29일 내설악 오세암에서 탈고 되어, 1926년 5월 20일 서울 회동서관에서 발행되었다. 시집의 제목 《님의 침묵》의 붉은 글씨는 만해 자신의 글씨다. 이 시집의 서문격인 〈군말〉도 붉은색으로 인쇄하여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시집 발행 당시는 한글에 대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등이 정리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만해는 현대시의 새벽을 열면서도 우리 문학의 전통인 운율과 고저장단에 맞추어 시를 썼다. 다시 말해 《님의 침묵》의 운율적 기교는 지금까지 우리가 접한 시집 중에서 한국어의 운율적 효과를 부각시킨 최고의 작품으로 찬사를 받을 만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사실을 강조하고 다녔다. 《님의 침묵》은 현재 200여 곳의 출판사가 가세하여 판본 수에서도 단연 최다이다. 그런 시집의 초판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의 큰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하다.

 

 

 

만해사상연구회 발족

 

1978년, 만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해사상연구회를 발족했다. 1979년이면 만해 탄생 100주년이 되니 기념논총 정도는 나와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또 1973년에 발행된 《한용운 전집》의 보유 증보판 간행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런 뜻을 신구문화사 이종익 회장에게 전했더니 흔쾌하게 후원을 약속했다. 우리는 신구문화사 한쪽 모퉁이에 사무실을 열고 만해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한용운 전집》 전 6권의 수정 보유 증보판을 만들고 총판까지 담당했다. 나는 이 일을 중심적으로 이끌었다.

 

그런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대한불교〉에 〈만해 정신의 현장〉을 연재하고(785-794호, 1979.4.15.~7.1), 다른 사람의 작품을 만해의 작품으로 잘못 소개한 잡지 《문학사상》의 오류에 대하여 〈타인 작품을 만해 작품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하여(〈대한불교〉 제 795호, 1979.7.8.) 바로잡기도 했다. 〈서울신문〉에서는 필자를 만해를 공부하는 ‘숨은 학자’로 소개하였다(1979.7.26.). 우리는 《한용운 전집》 보급을 통해 마련한 정재로 1979년 12월, 만해 묘소를 정비하고 상석과 비석을 세웠다. 이듬해 3월 1일에는 묘비 제막식도 가졌다. 아울러 100주년 기념논총 《한용운 사상연구》(1980년 6월)도 발간했다.

 

또 한 가지 기록해둘 일은 《님의 침묵》 시집의 정본을 발행한 것이다. 그때까지 《님의 침묵》은 판본에 따라 적지 않은 오류가 보였다. 심지어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부터 시중에 유통되는 책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상당했다. 나는 오류의 원인을 찾기 위해 《님의 침묵》 시집 판본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우선 시중의 유통분과 그 당시 출간된 48종이나 되는 판본 자료를 모두 모았다. 모아놓고 보니 고어(古語), 방언, 맞춤법의 변천에 따른 표기법의 차이와 활자의 변천에 따른 표기 방식 차이점, 오‧탈자, 착각에서 빚어진 오류가 심각했다. 더욱이 석‧박사 학위 논문의 만해 인용 시 자체가 잘못된 예도 있었다.

 

나는 1926년 5월 회동서관에서 발행된 《님의 침묵》을 중심으로 한 편 한 편 대조하면서 검토하였다. 회동서관판은 한글 맞춤법 제정(1934.5) 이전에 발행된 시집이다. 이 시집을 기준으로 살펴보니 비교적 잘 만들었다고 평가받은 시집조차 40여 곳 이상 오자, 탈자가 발견되었다. 또 심한 경우는 무려 160여 곳 이상의 오류가 있었다. 그 이유는 그때까지 원전 중심의 출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조금 팔린다 싶으면 그냥 베껴서 시집을 출판하는 데서 초래된 부작용이었다. 오‧탈자까지 그대로 베낀 오류투성이 시집 《님의 침묵》이 유통되었던 것이다. 특히 광복 이후 발행된(1950.4.5.) 한성도서주식회사 판본은 가장 널리 유통된 저본이었는데, 이 책 역시 당시의 맞춤법을 따르다 보니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시중의 유통분들을 모아 본격적인 자료 분석에 들어갔던 우리는, 원전 비평의 중요성을 지적도 할 겸 정본 《님의 침묵》을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정본 《님의 침묵》은 시집인지라 한 글자의 오자도 허용치 않기 위하여 6번의 교정을 거쳤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대학원생을 동원하여 잘못된 글자 한 자를 찾아내면 1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또다시 교정을 보았다. 정본 《님의 침묵》을 원전의 형태와 가능한 한 동일하게 만들기 위하여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비단 천을 사다가 수제로 배접하여 한 권 한 권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완벽한 정본 시집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 군데 오류가 발견되어 수정판을 인쇄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판공이 시 〈찬송〉의 제목을 잘못 건드려 글자가 빠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3판을 펴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정본 《님의 침묵》이다. 이 시집은 민족사에서 1980년 12월 20일 발행되었다. 정본 시집을 펴낸다는 자부심과 오자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추진한 일이었다.

 

 

 

성북동 심우장 복원

 

1979년에 만해 탄생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1970년 서울 상경 후에 가끔 들르던 성북동의 심우장이 떠올랐다. 심우장은 그때까지 여전히 전셋집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이 집을 기념관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당시 세입자였던 지현이네를 설득하여 전세금 350만원을 주고 내보낸 다음, 심우장을 만해기념관으로 꾸몄다. 상경하며 처음 가졌던 꿈을 10여 년 만에 이룬 것이었다. 1981년 10월 30일 드디어 성북동 심우장을 전세 임대하여 만해 연구와 기념관 관리를 시작했다. 심우장은 만해가 독립운동의 동지를 만나고 후배를 가르치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조국이 일본에 짓밟히고 있을 때 조국 독립의 의지를 가다듬던 뜻깊은 장소이다. 만해사상연구회는 심우장의 만해기념관을 중심으로 《조선불교유신론》(1983.3), 《한용운사상연구 제2집》(1983), 《석전시초》(1983), 《석전문초》(1984), 《한용운 시론집》(1984) 등을 발행하여 만해사상의 선양과 보급에 앞장섰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자리한 만해 한용운 묘역에 비석과 상석을 새롭게 정비하고, 1982년 3월 1일에는 관계자를 초청해 성대한 기념식도 치렀다.

 

그러나 심우장을 가꾸고 유지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도울 것이라는 희망으로 열성을 다했지만, 정성이 모자랐는지 운영 관리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서울시 문화재 담당자에게 관리 보존을 위해 심우장을 문화재로 등록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문화재 담당관은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심우장이 문화재가 되어야 하는 이유와 함께 종합적인 관리 운영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보기 좋게 거절되었다. 그런 사례가 없다는 것과 집의 건축적 존재 가치가 낮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서류를 보완하였다. 이 나라 이 강토가 일본에 유린당할 때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을 택한 심우장은 조선 우국지사들의 담론이 익어간 곳이며 조선의 혼을 간직한 장소이다. 이 정신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또 부결되었다. 이번에는 계획을 바꾸어 문화재 심의위원 개개인을 방문하여 설득하였다. 지금의 기준과 안목으로는 문화재가 아닐지라도 훗날 반드시 문화재가 되는 그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날이 오면 심우장 출입금지자 선포식도 함께 하겠노라는 협박 아닌 협박도 했다.

 

 

▲ 북향집 심우장을 만해기념관으로 개관(1981.10.31)하고 만해기념관장으로 인사하는 모습

 

마침내 네 번째 심의에서 심우장은 서울시 사적 제 7호로 지정받았다(1984.6). 심우장은 개인이 살던 집이 문화재가 된 최초의 사례를 기록한 문화유적지로, 성북구청에서 특별 관리하는 성북동의 명소가 되었다. 그 후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된 2019년 3월 1일에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문화재청은 서울시 기념물 제 7호인 ‘만해 한용운 심우장’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 550호로 지정했다. 심우장은 한용운의 독립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점에서 문화재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의 민족혼과 독립 정신을 느껴보고자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 망우리 만해묘소에서 기념비와 상석을 설치하고 제막식(1982.3.1)을 하는 모습 

 그렇지만 나의 성북동 심우장의 만해기념관 시절은 영광과 좌절을 함께 겪은 시기였다. 어느 날은 사람이 방문하지 않아서 고민이었다가도, 한꺼번에 10여 명이 오면 앉을 자리가 없어서 당황하기도 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만해기념관의 운영을 개인이 책임지는 것은 한계가 느껴졌다. 경영의 어려움으로 고심하던 나는 만해기념관 이전을 결심하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했다. 그때 떠오른 곳이 호국정신의 성지인 남한산성이었다. 이곳은 내가 교수로 있던 신구 전문대에서도 가까운 곳이어서 관리도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남한산성에 기념관 터를 확보한 나는 심우장에 있던 자료들을 새 둥지로 옮기고 여기에서 기념관을 운영하기로 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남한산성에 만해기념관 개관

 

만해기념관을 남한산성으로 옮기는 데는 유럽을 여행할 때 느꼈던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유럽은 그 지역의 문화적 역량을 옛 성(城)에 총 집결시키고 있었다. 우리에게 민족의 자존심이 남아 있는 고성은 남한산성이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치욕, 굴욕, 패전지라는 잘못된 인식이 굳어져 있었다.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잘못 배운 식민사관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곳은 어느 곳보다 민족의 독립과 저항정신이 모인 곳이다. 그것은 마치 3‧1 만세운동이 일제에 의해 좌절됐지만 독립의 의지를 내외에 천명한 것과 같은 것이다. 비록 실패하고 좌절했다고 해도 그 정신마저 좌절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이야말로 호국정신의 성지이다. 만해기념관을 어딘가로 이전해야 한다면 여기보다 더 적절한 곳은 없을 것이다. 특히 남한산성에는 8도의 사찰과 본부 사찰을 합하여 9개의 승영(僧營) 사찰이 있던 국가 사적지다. 이러한 장소에서 만해기념관을 운영한다면 만해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만해기념관을 민족자존의 성지인 남한산성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1990년 5월 심우장에 있던 만해기념관을 남한산성으로 이전했다. 많은 탐방객이 찾는 곳이어서 기념관을 제대로 만든다면 만해를 더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처음에는 기존의 주택을 이용하여 소박한 기념관으로 꾸몄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주말을 중심으로 방문객들이 차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개포동의 아파트를 팔았다. 모든 역량을 남한산성 이곳에 집중하기로 했다. 1997년 봄부터 터를 닦고 기념관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1998년 5월 25일 현재의 만해기념관을 완성하여 재개관하였다. 존경하는 석주 스님, 월운 스님을 모시고 재개관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서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이전이 끝나자 2002년 만해기념관을 정식으로 국가에 박물관으로 등록(문광부 등록번호 제 243호)도 완료했다. 한국박물관협회에도 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박물관‧미술관 진흥법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갖추어 나갔다. 비로소 공공기관으로서 박물관 활동을 세상에 드러내놓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온전한 불씨 하나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영원의 터전을 마련한 셈이다.

 

만해기념관은 남한산성 주봉이 자리한 수어장대 아래, 남한산성 행궁을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 하늘이 점지해 준 땅이라고 생각하며 기념관을 가꾸고 또 가꾸어 나갔다. 그사이 명실상부한 사립박물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건물과 소프트웨어인 콘텐츠는 어느 정도는 갖추었다. 그래도 늘 어렵고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다. 사립박물관의 숙명과도 같은 경영의 어려움은 멍에와 같은 짐이었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정신으로 경기도 박물관협의회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면서 경기도 박물관 지원 조례를 전국 최초로 통과시켜 경기도의 지원책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한편 한국사립박물관협회를 법인화하고 회장을 역임하면서 사립박물관 존재의 중요성을 문화체육관광부에 직접 설득하여 소기의 성과도 거두었다. 이러한 일들이 바탕이 되어 한국박물관협회 6, 7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박물관 행정의 중요성과 활성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박물관 활성화 정책과 행정은 사립인 만해기념관 운영에도 많은 보탬이 되었고 사립박물관 경영이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만해기념관이 뿌리를 내릴 즈음 남한산성 복원 정비기획단이 설립되어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산성과 남한산성 행궁의 복원 사업과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하여, 2014년에 비로소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올려놓는 성과도 거두었다.

 

 

▲ 만해기념관 전경

 

 

만해기념관 운동은 활활 다 타버리고 재가 되는 불쏘시개가 아닌, 불씨가 되어 영원히 타오르게 하는 문화운동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2017년도에는 박물관 발전 유공자로 대통령 표창도 받았고, 2019년에도 박물관 전시 유공자 표창도 받았다. 요즘은 만해기념관 유튜브(YouTube) 방송으로 시간을 보내며 땀흘리는 즐거움, 늘 새롭게 도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만해기념관에는 《님의 침묵》 초간본과 200여 종의 판본,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된 《님의 침묵》 시집, 만해가 저술한 《조선불교유신론》과 만해의 친필 유묵, 1962년 정부가 추서한 대한민국 건국 공로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 학술논문 및 연구자료 등 3천여 점이 수집, 소장돼 있다.

 

나는 요즘 대학에서 정년을 한 뒤 만해기념관의 활성화를 위한 불씨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만해의 시 가운데 〈나룻배와 행인〉을 특히 좋아한다. 이 시에는 삶의 곡진한 의미가 깊게 담겨 있으며, 이 시를 읽으며 인생의 숭고한 가치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나오는 나룻배와 행인은 불이(不二)로서 하나의 개념이다. 앞으로 나는 기념관의 전시 내용을 더 깊이 있게 정리하고 의미 있는 전시를 지속적으로 열어 만해를 널리 알려 나가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최근에는 금경(金經) 〈님의 침묵〉도 만들었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님의 침묵〉은 21세기 한글로 만들어진 깨침의 노래 철학서로 우리 민족이 영원히 읽고 기념하여야 할 고전이기 때문이다. 의암(義巖) 김정호(金正昊) 작가의 금경 〈님의 침묵〉은 국보 제 123호 은제 도금 《금강경》의 제작기법을 응용한 작품이다. 황동판에 좌우 반사로 음각한 후 0.1mm 두께의 동판을 올리고 한 글자 당 50여 회 이상 두드려 양출시키는 방법으로 제작하였다. 순금으로 도금하여 완성한 금경(金經) 장르 최초의 국한문혼용 창작품이다.

 

돌아보니 나의 평생은 만해 한용운과 함께한 세월이었다. 오늘의 나는 오로지 만해가 만들어준 것이다. 왜 만해인가. 알다시피 만해는 님의 침묵을 쓴 시인이자 〈조선불교유신론〉을 쓴 불교 사상가이고 독립운동의 선봉에 선 민족의 지도자였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이런 전인격 인격을 갖춘 사람을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를 기리고 받들지 않는다면 누구를 기리고 받들 것인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만해기념관을 거닐며 만해정신이 영원히 살아있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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